초코와 크림이 어우러진 동그랗고 부드러운 파이는 오리온, 롯데, 해태 등 제과 회사가 모두 출시하지만 우리가 사고 싶은 것은 다름 아닌 ‘정(情)’이고, 더 많이 함유된 비타민이 내 피부 세포를 아무리 밝혀줄지언정 비타1000대신 ‘비타 500’에 손이 가는 이유는 이 선택받은 브랜드들이 이미 이성적인 계산이 필요 없는 안전 지대에 진입했기 때문이다. 나의 마음을 움직인 브랜드들은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사실 또한 잘 인지하고 있으며 끊임없이 감성 코드를 자극하기 위한 시도를 주저하지 않는다.
어제의 승자가 잠시 한숨 돌리는 사이 비슷한 경쟁력으로 무장한 동종 브랜드가 얼굴을 내밀고, 신기술을 탑재한 더 똑똑한 제품군이 등장하고, 달라진 라이프스타일을 추구하는 소비자의 복합적인 욕구가 어우러지면서 브랜드는 매일 아침 ‘또다시 잊힐 위기’를 마주한다. 헤리티지 있는 장수 브랜드들이 리바이탈라이징, 즉 브랜드 재활성화로 소비자들에게 재인식되려는 데 공을 들이는 이유다. 브랜드 재활성화는 브랜드 라이프 사이클(BLC)을 거치며 생겨나는 다양한 시장의 위협에 효과적으로 대응해 브랜드 자산 가치를 유지하고 강화하는 전략을 말한다.
마르셀 푸르스트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진정한 탐험의 여정은 새로운 경치를 찾는데 있는 게 아니라, 새로운 시각으로 보는 것에 있다’고 했다. ‘바꾸되 바꾸지 마라(Change it, but do not change it)’는 포르쉐의 디자인 정책은 ‘세태에 맞는 변신은 계속하되 가장 중요한 원형은 바꾸지 말라’는 의미일 테고 말이다. 무엇을 어떻게 바꾸고 어떻게는 바꾸지 말라는 것일까? 오랜 기간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브랜드로 남은 브랜드들의 공통점은 변함없이 좋은 제품과 서비스를, 끊임없이 새로운 고객층에게 ‘가장 친절한 언어’로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디자인은 그 미학을 논하기 이전에 태도의 문제다. 매우 중요한 이야기이기에 얼마큼 이 이야기를 잘 전달할 열의가 있는지를 보여주는 바로미터이자 그 브랜드의 ‘진면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공평한 심사대이기도 하다. 정말 좋은 콘텐츠가 없는 제품의 성공적인 디자인은 불가능하며, 반대로 성공적인 제품치고 난해한 디자인으로 불친절하게 군 사례는 드물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무려 1897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대한민국 최초의 양약이자 오늘날 표현으로 브랜드에 해당하는 까스활명수는 여전히 ‘과음, 과식엔 활명수’라는 핵심 메시지를 강조한 광고와 더불어 콘셉트에 맞는 크리에이티브를 활용한 한정판 패키지로 이슈를 이끌어낸다. 활명수 탄생 117주년인 2014년에는 팝 아티스트 이동기와의 협업으로 물방울을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 일부를 활명수에 접목해 젊은 소비자가 이 증조할아버지와도 같은 브랜드를 애니메이션 보듯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올해 창립 50주년을 맞은 국내 최초의 주방 세제 애경 트리오또한 투명한 펌프형 용기에 사용 성분을 낱낱이 적은 ‘트리오 투명한 생각’ 라인을 론칭했다. 노란색 병에 빨간 뚜껑으로 각인된 기존 디자인이 주던 ‘합리적 가격의 강력한 제품’이라는 이미지를 넘어, 자연 성분의 순한 세제를 선호하는 시장에 반응해 정직함과 깨끗함을 강조한 디자인을 고안했다. 세제 패키지에 곧잘 등장하는 윤이 나는 접시나 과일 이미지 대신 단단한 바람체의 로고타입만을 강조한 ‘투명한 생각’이라는 다섯 글자를 예스러운 세로 쓰기로 적었다. 국민대학교 경영학부 주재우 교수는 브랜드가 변화하는 시대에 발맞춰 새 시장을 개척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틀린 것을 바로잡는 것’이라 말한다. 즉 고유의 브랜드 퍼스널리티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잘못된 디자인을 바르게 재정립하는 것이다.
그는 “물론 재정립에 따르는 리스크는 감수해야 한다. 철저한 시장 리서치를 통해 타깃군이 원하는 디자인 철학과 수요를 간파해 위험을 최소화하는 것이 방법일 것”이라고 조언했다. 2015년 인터 브랜드의 톱 10 브랜드를 보면, 1998년 창업한 구글을 제외하고는 모두 브랜드 성년이라고 말하는, 2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장수 브랜드다. 얼마나 많은 시장의 변화에 적응하고, 고군분투 해오며 브랜드를 지켜왔을지를 생각해보면 톱 10에 주어지는 칭호가 아깝지 않다. 역사는 짧지만 SNS를 통해 전에 없던 파급력으로 강렬한 러브마크를 날리는 신생 브랜드가 늘고 있다는 사실 또한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 사이에서도 짧은 주기로 촘촘히 시도하는 브랜드 재활성화는 여전히 화두다.
물론 단순히 로고를 바꾸고, 바이럴 영상을 제작하고, 한시적 퍼포먼스를 한다고 모두 리바이탈라이징에 성공하는 건 아니다. 펜타그램의 마이클 비어루트(Michael Bierut)가 한 말처럼 원래 ‘나머지는 쉽다(The rest is easy)’. 콘텐츠가 좋으면 시작이 반이듯 그 이후는 잘하기 나름이라는 것. 하지만 여기서 또 한번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품질이 상향 평준화된 성숙한 브랜드 시장에서 좋은 제품은 훌륭한 스펙 못지않게 소비자에게 얼마큼 좋아 ‘보이느냐’를 어필하는 것도 중요하기 때문이다. ‘좋아보이고자 함’의 위력을 아는 진정 좋은 브랜드가 가장 자기다운 친절한 디자인 언어로 끊임없이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것만이 최고로 이상적인 브랜드 생태계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바이라인: 글 김은아
참고 자료: <러브마크Lovemarks: The Future Beyond Brands, 2004 >, <브랜드 매니지먼트Strategic Brand Management, 2007>, <오바마를 디자인하다Designing Obama,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