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 노트북을 고르려던 순간, 저는 분명히 이렇게 생각했죠. “성능 괜찮고, 가격만 착하면 돼!” 그런데 온라인에서 제품들을 쭉 비교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눈길을 끄는 건 따로 있었습니다. 예쁜 디자인, 환경에 덜 무리 주는 특징. 처음엔 그다지 중요하지 않던 요소들이 비교 속에 놓이는 순간, 갑자기 매력적으로 보이기 시작한 거죠. 왜 이런 일이 생길까요? 바로 ‘평가용이성’이라는 비밀 때문입니다.
키워드
#비교 #소비 #소비심리 #평가용이성 #행동경제학
여러분은 무언가를 살 때 어떤 기준으로 제품을 고르시나요? 저는 얼마 전 노트북을 사려고 고민하다가 묘한 경험을 했습니다. 처음에는 값싸고 성능이 좋은 제품이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인터넷 쇼핑몰을 둘러보며 여러 제품을 비교해 보니, 디자인이 예쁘면서 환경에 무리가 덜 가는 제품이 눈에 들어오더군요. 단독으로 볼 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던 요소가 다른 제품과 함께 비교하니 갑자기 매력적으로 느껴진 겁니다. 이런 현상에는 ‘평가용이성’이라는 행동경제학 개념이 숨어 있습니다.
학점은 알겠는데, BMI는 애매하다?
평가용이성(evaluability)이란 어떤 속성의 값이 얼마나 바람직한지 쉽게 판단할 수 있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쉽게 말해서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바로 알 수 있나?”라는 질문에 대한 답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누군가 대학교 학점이 3.9라고 할 때와 체질량지수(BMI)가 22.5라고 할 때를 생각해 봅시다. 두 숫자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시나요? 아마 대부분은 학점 3.9는 “꽤 좋은 성적이구나!”라고 바로 떠올릴 수 있을 거예요. 반면 BMI 22.5는 어떤가요? 이 숫자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죠? 이게 바로 평가용이성으로 인한 차이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학점에 대해 대강의 평균과 범위라는 참고 정보를 갖고 있어서 점수를 보면 대략 어느 정도의 성적인지 알 수 있습니다. 반면 체질량지수는 대부분의 사람이 숫자를 가지고 직접 비교해 본 경험이 적어 참고 정보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22.5가 높은 건지 낮은 건지 바로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와 비슷하게 섭씨는 평가용이성이 높아서 섭씨 30도라고 하면 “덥구나!” 하고 바로 알 수 있지만, 화씨는 평가용이성이 낮아서 화씨 50도라고 하면 얼마나 더운지, 추운지 바로 알기 어렵죠.
평가용이성에 따라 달라지는 선택
평가용이성의 흥미로운 점은 비교 상황에 따라 우리의 우리의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입니다. 시카고 대학의 크리스 쉬(Christopher Shee) 교수님이 진행한 두 가지 실험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놀랍게도 어떻게 평가하는가에 따라서 결과가 완전히 뒤바뀌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이 현상의 비밀은 우리가 판단할 때 평가용이성이 높은 것에 더 많이 의존한다는 데 있습니다. 두 개의 음악 사전을 따로 평가할 때(a)는 눈에 보이는 깨끗함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지만, 두 사전을 나란히 놓고 비교(b)하니 “아, 수록곡 20,000개가 10,000개보다 훨씬 많구나!”라고 깨달은 거죠. 즉, 겉모습처럼 평가용이성이 높은 속성은 따로 평가되건 함께 비교되건 중요성이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수록곡 수’처럼 평가용이성이 낮은 속성은 따로 평가할 때는 중요하지 않다고 무시하지만, 함께 비교될 때 비로소 중요하게 고려되는 거죠.
중고 음악 사전 ‘겉모습’ = 누가 봐도 바로 알 수 있음 = 평가용이성 높음
중고 음악 사전 ‘수록곡 수’ = 얼마나 많은지 감이 안 옴 = 평가용이성 낮음
우리 뇌가 속는 이유
크리스 쉬 교수님은 이런 실험도 했습니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아이스크림 그림을 보여주면서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 적어달라고 했죠. 이번에도 한 집단에게는 두 개의 아이스크림 중 하나만 보여주고(a)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 적어달라고 했고, 또 다른 집단에게는 두 개의 아이스크림을 함께 비교하면서(b) 얼마까지 지불할 수 있는지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결과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결과는 중고 음악 사전 실험과 동일했습니다. 따로 볼 때는 컵 B(넘치는 아이스크림)가 더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두 개를 함께 놓고 보니 컵 A가 실제로 양이 더 많다는 걸 알 수 있었죠. 즉, 따로 평가하면 양이 많아 보이는 아이스크림(B)을 더 선호하지만, 함께 비교하면 실제로 양이 많은 아이스크림(A)을 더 선호합니다.
평가용이성은 어떻게 활용될까?
전략 1: 적게 주되 많아 보이게
고급 꽃집에서 사용하는 전략입니다. 구매자가 직접 비교하지 못하도록 꽃 진열을 분리해 놓은 뒤, 평가하기 쉬운 속성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죠. 같은 양의 꽃이라도 큰 바구니보다 작은 바구니에 담긴 꽃은 더 풍성해보여 훨씬 매력적으로 느껴지고, 더 비싸게 팔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두 바구니가 같은 곳에 나란히 놓여 비교할 수 있다면, 같은 양의 꽃이 여유 있게 담긴 큰 바구니가 더 잘 팔리게 됩니다.
전략 2: 숨은 장점은 비교로 드러내기
디자인, 친환경, 공정무역처럼 좋은지 나쁜지 당장 평가하기 어려운 속성을 가진 제품들은 어떻게 할까요? 보통 이런 제품들은 가치가 높지만 동시에 가격이 비싸므로 혼자 두면 잘 팔리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럴 때는 비교를 통해서 그 가치를 드러내면 좋습니다. 예를 들어, 콩고 분쟁지역에서 나온 금속(conflict metal)을 사용하지 않은 USB 저장 장치는 가격이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이 제품 하나만 진열해 두면 “왜 이렇게 비싸지?”라고 생각하겠지만, 일반 제품과 나란히 놓고 “인권과 환경을 생각한 제품”이라고 설명하면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어요.

똑똑한 소비를 위한 체크리스트
평가용이성이라는 개념 하나만 알아도 일상의 수많은 선택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마케팅에 현혹되지 않고, 진짜 중요한 가치를 볼 수 있죠. 다음번에 쇼핑할 때는 이렇게 생각해 보세요.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것이 정말 중요한 속성일까?”, “눈에 보이지 않는 더 중요한 가치는 없을까?”, “다른 제품과 비교해 보면 어떨까?” 이런 질문만으로도 선택이 달라질 거예요. 나아가 똑똑한 소비를 위한 체크리스트까지 더해 본다면 훨씬 더 만족스럽고 현명한 소비로 이어질 것입니다.
- 첫인상에 속지 않기 : ‘많아 보이는 것’과 ‘실제로 많은 것’을 구분하세요. 화려한 포장에 현혹되지 말고, 실질적인 내용과 가치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 의도적으로 비교하기 : 제품을 구매할 때는 의도적으로 여러 제품을 비교해 보세요. 비교를 통해 개별 적으로 볼 때 놓쳤던 중요한 속성들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 속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뒤늦게 알게 될 수도 있어요.
- 비교하기 어려운, 보이지 않는 중요한 가치 찾기 : 가격이나 성능만 보지 말고 다음과 같은 숨은 가치들도 함께 고려해 보세요. 브랜드의 사회적 책임 활동, 환경에 미치는 영향, 디자인의 독창성 등은 평가용이성이 극도로 낮으므로 무시되기 쉬워요. 하지만 이런 가치들도 매우 중요합니다.
- 후기 적극 활용하기 :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나 사용 후기는 평가용이성이 낮은 속성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실제로 써보니 어떤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거든요.
- 주재우, “우리는 왜 비교를 해야 할까? 평가 용이성과 비교의 마술,” 기획재정부, 한국개발연구원 (KDI), 경제배움 e+, 우리가 사는 경제, 2025.09.24.
***
Reference
Hsee, C. K. (1998). Less is better: When low‐value options are valued more highly than high‐value options. Journal of Behavioral Decision Making, 11(2), 107-121.
This research demonstrates a less-is-better effect in three contexts: (1) a person giving a $45 scarf as a gift was perceived to be more generous than one giving a $55 coat; (2) an overfilled ice cream serving with 7 oz of ice cream was valued more than an underfilled serving with 8 oz of ice cream; (3) a dinnerware set with 24 intact pieces was judged more favourably than one with 31 intact pieces (including the same 24) plus a few broken ones. This less-is-better effect occurred only when the options were evaluated separately, and reversed itself when the options were juxtaposed. These results are explained in terms of the evaluability hypothesis, which states that separate evaluations of objects are often infuenced by attributes which are easy to evaluate rather than by those which are important.
